평등사회로 전진하는 활동가 연대(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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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직’의 연합이 아니라 ‘운동’의 연합이다
이가림  2006-08-02 14:58:49, H : 1,453, V : 161
- SiteLink #1 : 이른바 ‘단일전선체’혹은 ‘상설연대체’건설 논의에 대해  


  얼마 전부터 진보운동 일각에서 ‘단일전선체’란 걸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분분했다. 그런데 그 실체가 모호했다. 기왕의 전국민중연대가 제 역할을 못하니까 대의구조도 갖고 지역조직도 갖는 명실상부한 상설 조직을 만드는 게 목적이라고 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민중연대와 통일연대가 따로 따로 있는 게 소모적이니까 둘이 합치는 게 주된 내용이라고 하기도 했다. 게다가 명칭도 이랬다저랬다 했다. 처음에는 ‘단일전선체’라고 하고 그게 언젠가부터 주로 ‘단일연대연합체’라 불리더니, 최근 민주노총에 안건으로 올라온 것은 ‘진보진영 상설연대체’ 혹은 ‘진보진영 총단결체’다. 그야말로 작명의 황금기다.
  <전진>은 이런 제안이 지금 민중운동에 절실히 필요한 과제가 아니며 자칫 하면 운동을 내부에서 교란하는 요소까지 될 수 있다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한미FTA 반대 투쟁 등 지금 진행되는 현실의 대중운동에 기반해서 민중연대를 강화․발전시켜야 한다는 게 그 대안이었다.

  이 글도 그러한 입장에 바탕을 두고 있다. 다만 이 논란을 기회로 ‘공동전선’(전통적으로 ‘통일전선’으로 번역돼 왔으며, ‘연합전선’, ‘협동전선’으로 불리기도 한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논의하고, 그리고 한국에서 공동전선 운동의 문제점이 무엇이었는지, 왜 지금의 소위 ‘단일연대연합체’안이 우리의 대안이 될 수 없는지, 다시 한 번 짚어보려 한다.  

  세계 변혁운동사에서 공동전선 운동의 교훈

  우선 확인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우리가 결코 공동전선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공동전선은 필요하다. 좌파정당이 발전하고 노동조합운동이 성장할수록 공동전선 운동도 더욱 강화되어야 한다.
  우리 주위에는 이제까지의 공동전선 조직들의 경험에 질려서 공동전선의 의의 자체를 부정하는 동지들도 있다.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 전농, 이런 조직들만 있으면 됐지 뭐 하러 전선체니 연대체니 하는 것들을 만드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목욕물 쏟아버린다고 아기까지 한 데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애초에 공동전선 전술이 왜 등장했는지부터 살펴보자. 공동전선 전술은 1921년 코민테른 3차 대회에서 ‘반파시즘 노동계급 공동전선’이라는 형태로 처음 등장했다. 새롭게 부상하는 파시즘의 위협에 맞서서 혁명적 노동자들이 사회민주당 계열 노동자들과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혁명적 입장을 버리고 노동운동의 다수파에 투항하라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사회민주당을 지지하는 노동자들 사이에서 함께 활동하면서 혁명적 사회주의의 독자적 입장을 적극 선전하라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지금도 우리가 주목해서 봐야 할 두 가지 문제의식이 담겨 있다. 하나는 진보진영 내의 다원성에 대한 존중이다. 서유럽 자본주의 나라들에는 사회민주당, 공산당, 무정부주의자들이 엄연히 따로 존재하며 서로 팽팽하게 경쟁하고 있었다. 당시 이들 사이의 입장 차이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노동계급의 단결은 필요했다. 이러한 두 가지 상반되는 현실 요청에 함께 부응하기 위한 전술 방침이 바로 공동전선이었다.

  이런 문제의식은 지금도 유효하다. 자본주의가 농익을수록 진보진영 내부의 다원성은 더욱 강화된다. 이것은 한국 사회도 예외가 아니다. 지금이야 워낙 진보세력이 차지하는 몫이 미미하다 보니까 민주노동당이라는 하나의 당에 다양한 세력이 함께 하고 있지만, 민주노동당이 성장하면 할수록 이런 상황은 쉽게 바뀔 수 있다. 그리고 그게 더 바람직할 수도 있다. 녹색당이 따로 생겨날 수 있고, <노동자의 힘>이 이야기하는 ‘비제도적 투쟁정당’이 등장할 수도 있다. 이들 정당은 당연히 서로 다른 강령과 정책을 갖고 경쟁을 하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수세력에 맞서 힘을 모을 필요도 있을 것이다. 이 때 서유럽이나 라틴아메리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당간 연합 형태로서의 공동전선이 필요하게 된다. 어떤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공동전선이 과거 변혁운동사의 유물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또 다른 문제의식은 대중의 정치적 경험을 보다 풍부하게 만들려는 노력이다. 초기 코민테른의 공동전선론은 항상 ‘아래로부터의 협력’을 강조했다. 때로는 그것이 사회민주당과의 실질적인 협력을 거부하기 위한 알리바이로 활용되기도 했다. 하지만 공동전선은 항상 아래로부터 건설되어야 한다는 원칙 자체는 결코 버릴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원칙이 노린 애초의 의도는 대중 스스로 새로운 정치적 경험을 통해 성장하고 단련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사회민주당을 지지하든 공산당을 지지하든 모든 노동자들이 “노동계급은 하나”라는 대의 아래 협력하고 연대하다보면 기존의 당 지지 성향에 따라 만들어진 단단한 벽도 허물어지리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21세기에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전통적인 노동운동뿐만 아니라 여성운동, 농민운동, 학생운동, 평화운동, 환경운동 등 다양한 대중운동이 등장할수록 아래로부터의 연대와 협력의 노력이 중요하다. 삶의 현장에서 바닥 대중들 사이에 그러한 경험들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런 ‘운동들의 운동’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전략이나 강령․조직들이 있어야 한다. 정말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게 무슨 ‘본부’라고 불리든 ‘상설연대체’니 ‘총단결체’니 하는 입 안에서 모래알처럼 서걱거리는 이름을 갖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런데 공동전선의 역사적 경험에는 이런 긍정적 교훈만 있는 게 아니다. 이후 사회주의운동의 역사에 커다란 숙제를 던져준 뼈아픈 실패의 이야기도 있다. 한 마디로, ‘연합’만 있었지 ‘중심’이 없었기 때문에 생긴 오류들이다. ‘중심’이 없다 보니 가지 말아야 할 길로 끌려가 버렸다.
  1936년에 프랑스에서 정권을 잡은 인민전선이 그 대표적 사례다. 인민전선에는 사회당과 공산당뿐만 아니라 급진사회당까지 참여했다. 급진사회당이라고 하니까 무슨 좌파정당 같지만, 굳이 우리 경우에 빗대 이야기하자면 열린우리당 같은 정당이었다. 부르주아 ‘개혁’ 정당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당이 끼어들어 결국 새 정부를 좌지우지하게 되니까 인민전선이 민중에게 약속한 것들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비슷한 시기에 미국의 루즈벨트 정부도 실시한 바 있는 금융 개혁조차 손도 못 대고 말았다.  
  세계 곳곳에서 비슷한 오류가 반복됐다. 서로 맞서는 부르주아 정치세력 중 어느 한 쪽과 손을 잡고 무슨 ‘전선’을 추진한다고 하다가 예외 없이 운동을 말아먹거나 무의식적으로 기성 체제의 하수인 노릇이나 해주고 말았다. 한국에서는 이것이 ‘비판적 지지’라는 이름으로 나타나 우리를 괴롭혀왔다. 공동전선 운동이 명확하고 독자적인 이념․강령 없이 부르주아 세력을 향해 문호를 열게 되면 쉽게 이러한 치명적인 위험에 빠질 수 있다. 
즉, 이제까지의 세계 변혁운동사는 우리가 공동전선 운동에서 반드시 견지해야 할 다음과 같은 원칙들을 웅변한다.

  첫째, 노동계급의 ‘중심’이 바로 서지 않는 공동전선은 백해무익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부르주아 세력이 끼냐 안 끼냐를 넘어선 문제다. 현재의 구체적인 상황에서 자본주의 극복의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구체적인 방침이 없는 공동전선은 운동의 경계를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 세력의 이데올로기 공세 앞에 운동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역할을 할 수 있다.
  둘째, 공동전선은 철저히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로써 건설되어야 한다.
  어느 조직이든 민주주의가 중요하다는 일반론의 맥락에서 그렇다는 게 아니다. 공동전선이란 게 애초부터 대중들이 스스로 정치적 경험을 만들어나갈 장으로 구상․기획된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노동조합 활동만 하고 혹은 자기가 속한 당의 활동만 해온 이들이 일상에서 그것과는 또 다른 경험을 갖는 기회로 작동하지 못한다면, 공동전선은 아무 것도 아니다. 참고로 공동전선에 대한 역사적 문헌들에서 이에 관한 언급들을 인용해보겠다.

 통일전선운동을 대중의 사업으로 전개하기 위해서 공산주의자는 기업에서, 실업자 사이에서, 노동자 지구에서, 도시 하층민 사이에서, 또 농촌에서 선거에 의한 (파시스트 독재 국가들에서는 운동의 가장 권위 있는 참가자 중에서 선출된) 초당파적인 계급적 통일전선 기관의 결성에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기관―이것은 결코 통일전선에 참가한 각 조직으로 대체되어서는 안 된다―만이 방대한 미조직 근로 대중을 통일전선운동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며, 자본 공세에 반대하고 파시즘에 반대하는 투쟁에 대중의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돕고, 이 기초 위에 통일전선의 광범한 노동자 활동가단의 창출을 도울 수 있을 것이다.
- 「파시즘의 공세와 파시즘에 반대하고 노동자계급의 통일을 지향하는 투쟁에서의 코민테른의 임무」, 코민테른 제7차 대회 결의(1935년 8월 20일). 강조는 인용자.

코민테른의 마지막 세계대회는 디미트로프의 보고서를 통해 인민전선의 대중적 지지지반으로 투쟁위원회가 대중의 선출에 의해서 수립되어야 한다고 천명했다. 이것은 아마도 코민테른의 전체 결의문 가운데 유일하게 진보적인 내용이다.
- 트로츠키, 「인민전선이 아닌 투쟁위원회를 건설하자」(1935년). 강조는 인용자.

  셋째, 따라서 공동전선에 중요한 것은 철저하게 ‘운동’이지, 그것에 따라붙는 강령이나 조직이 아니다.
  물론 노동조합도, 당도 ‘운동’이어야 한다. 하지만 노동조합이나 당은 ‘운동’으로서의 본연의 임무를 잘 수행하지 못해도 존립은 할 수 있다. 물론 상황이 이렇게 되면 사회주의 세력의 역사적 패배를 의미하는 것이겠지만, 아무튼 자본주의 사회가 존립하기 위해서도 노동조합이나 노동자들의 합법정당은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동전선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단순한 일상 조직으로서는 아무런 의의도, 최소한의 존립 근거도 없다. 그것은 그 정의(定義)부터가 ‘운동들의 운동’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공동전선 운동의 문제점, 그리고 이른바 ‘단일전선체’

  한국에서 공동전선 운동은 ‘비판적 지지’의 추억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단일전선체’ 논의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가장 기본적인 이유도 거기에 있다. 1987년에 민통련이 그랬고 1992년에 전국연합이 그랬다. 1997년에는 전국연합이 독자후보운동에 나서는 듯 하더니 결국은 배신하고 말았다. 지금도 <전진> 내부를 비롯해 노동자․민중운동의 좌파 진영에서는 ‘단일전선체’ 논의가 혹시 다시 한 번 ‘비판적 지지’를 감행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은 아닌지 의심하는 분들이 많다. 그런데 심증만 있지 물증은 없다. 그래서 이 글에서 그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지는 않겠다.

  문제는 한국에서 공동전선 운동의 안 좋은 추억이 그것 하나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국의 전선 조직은 오랫동안 유사-정당의 역할을 떠맡아왔다. 정당이 없는 상황이 지속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독자적 대중 기반 없이 노동조합이나 농민회 바깥에 포진한 수많은 운동가들이 전선 조직에 포진했다. 전선 조직은 이런 활동가 층을 위한 관료 조직이 되었다. 이른바 정파 활동가들의 무대가 된 것이다. 
  이 유사-정당은 정작 정당의 바람직한 기능은 하나도 수행하지 못하면서 정당이 보일 수 있는 안 좋은 모습은 똑같이 보였다. 대중에게 정치적 대변자로 인정받거나 대중조직을 정치적으로 이끌지도 못하면서 정파 활동가들은 넘쳐났다. 정파가 있는 곳에는 정파 투쟁이 있을 수밖에 없다. 여기까지는 좋다. 이것은 민주적 정치조직이라면 다 마찬가지 아닌가. 그런데 정당은 이런 정파 경쟁의 추이가 결국 대중의 지지 여부에 따라 결정되는 데 반해 전선 조직에는 그런 대중적 검증과 심판의 메커니즘이 없었다. 
  대의원대회가 있었지만, 그것은 운동에 참여한 대중들에 의해 직접 선출된 대표로 구성된 게 아니었다. 각 대중조직의 상층에서 누가 대의원이 될지 결정해서 파견한 것이었다. 이런 대의원대회 구조는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와는 한참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상대적으로 많은 수의 활동가들을 보유한 정파가 형식적인 다수결 절차를 통해 자파의 견해를 운동 전체의 합의로 둔갑시키는 데 딱 좋은 구조였다. 이 점에서 전선 조직은 활동가 층의 관료 조직, 더 정확히 말해 전체 운동 진영에서 기계적 다수를 점한 정파에 속한 활동가 층의 관료 조직이었던 셈이다.
  이렇게 되니까 전선 조직의 권위는 지속적으로 추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선 조직에서 나온 결의란 게 민중운동 내의 광범한 토론과 고민, 설득의 결과물이 아니라 수 대결을 통해 정당성의 외피를 확보한 특정 정파 입장의 강요 정도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파 활동가들만 보면 이른바 전선론자들이 다수인데, 막상 대중운동 수준에서는 ‘전선 무용론’이 공감을 얻는 상황이 나타났다. 전민련이니 전국연합이니 하는 조직들이 결국 대중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간 게 다 이런 경험들 때문 아닌가.

  그런데 지금의 ‘단일전선체’론은 이 불쾌한 기억을 되살리려 하고 있다. 민주노총 문건에 등장한 ‘진보진영 총단결체’의 구체적인 상을 보면, 기존의 전국민중연대와 비교해서 뚜렷하게 구별되는 점이 바로 “기층의 참여를 보장하는 대의체계 설치”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말은 좋다. “기층의 참여를 보장하는”. 하지만 그 실 내용을 보면 “기층의 참여”란 공허한 수사임을 쉽게 확인하게 된다. “민주노총의 연맹과 지역본부, 전농의 도연맹과 시군농민회, 학생운동의 총학생회의 대표자들과 각 단체 대표, 지역연대체의 대표단 등이 망라되는” “700~800명 규모의 대의원대회” 혹은 “200명 안팎의 중앙위원회”를 설치하겠다는 것이다. 700~800명이라니, 참 많은 것 같다. 하지만 그 구성을 살펴보면, 결국 각 단체의 상층에서 관료적으로 선임한 대표자들이다. 민주노동당의 당원,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당이나 노동조합의 각급 지도부를 뽑듯이 아래로부터 선출한 게 결코 아니다.
  마침 민주노동당에서도, 민주노총에서도 내부 민주주의를 강화하려는 노력들이 한창 진행 중이다. 민주노동당에서는 지역 할당 대의원은 당원들의 선출 절차를 거치는 데 반해 부문 할당 대의원은 그렇지 못한 데 대한 문제제기가 치열하다. 민주노총의 대의원대회 구조도 보다 민주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논의가 분분하다. 그런데 이런 조직들 바깥에 이러한 내부 민주화 흐름과 역행하는 대의원대회를 굳이 하나 더 만들자는 것이다.

  왜일까? 왜 만들어야 할까? 다시 정파 활동가들의 집단적 거처가 필요해서? 활동가 숫자로 다수파임을 자부하는 특정 정파가 다시금 쪽수로 뭔가 밀어 붙여야 할 일들이 더 남아 있는 것인가?    
  대중운동의 연합은 항상 필요하다. 작년에는 덜 필요했는데, 지금은 더 필요한 게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항상 더욱 발전되어야 한다. 하지만 현재의 ‘단일전선체’론은 공동전선 운동이 마땅히 갖춰야 할 가장 기본적인 덕목들을 하나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운동’이 아니라 ‘조직’ 그 자체가 우선시되고 있다. 앞으로 몇 년 동안 이러저러한 요구들만은 운동 전체의 절박한 과제로서 정말 명운을 걸고 한 번 싸워보자는 결의 같은 것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갑자기 연대와 소통과 민주주의의 만병통치약으로 등장한 대의원대회가 조직 물신주의의 심각한 징후를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또한 그 건설 과정과 조직 구상이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지역에서 민주노총 조합원과 농민회 회원, 민주노동당 당원과 각 정치조직 회원 수준의 연대와 협력을 어떻게 만들어낼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비전이 없다. 지역조직 건설도 각 단체 지역조직의 상층에서 해결할 문제로 돼 있다. 대중이 직접 대표를 선출하는 것과 같은 실질적인 민주 절차는 대의체계 앞에 붙는 “기층의 참여를 보장”한다는 아름다운 수식어로 가름된다.

  없는 게 그것만은 아니다. 여기에는 ‘중심’도 없다. 이념․강령적 중심이 없는 것이다. 물론 몇몇 문건은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민족자주와 반전평화 쟁취’ 등등을 강령이라고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전국민중연대에도 이 정도의 추상적인 합의는 있다. 이것은 보다 발전된 공동전선의 강령이 되기에는 너무도 부족한 내용이다. 최소 강령이라기에는 너무 앙상하고 추상적이며, 최대 강령이라기에는 아무런 이념적․사상적 품격이 느껴지지 않는다. 또한 과도 강령이라기에는 그에 걸맞는 변혁적 매개 고리와 실천적 강조점의 제시가 전혀 없다.
  도대체 준비된 것도 없고, 특별히 절박한 요청도 댈 수 없다. 어떻게 하면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의 대의원대회에서 사업을 승인 받을까 하는 데만 골몰한 행태로 보건대, 진지함조차도 없다. 이게 ‘단일전선체’라는 거창한 명의로 시작되었다가 현재는 ‘상설연대체’로 다시 말을 바꾼 이른바 ‘단일연대연합체’ 제안의 실상이다. 

  대안은 무엇인가?

  다시 반복하건대, 대안은 현실의 대중투쟁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공동전선을 강화할(조직적으로든, 이념․강령적으로든) 계기를 찾는 것이다. 민중연대의 지난 활동을 제대로 다시 짚어봐야 하고, 한미FTA 반대 투쟁의 추이를 주목해야 한다.
  정말 진지하게 공동전선 운동을 고민한다면, 한미FTA 반대 투쟁 과정에서 ‘민중회의’의 소집 같은 방안을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한미FTA에 반대하는 각 대중조직의 현장에서 대표들을 선출해 ‘민중회의’를 구성하는 것이다. ‘민중회의’는 한미FTA 협상에 대한 대중적 토론장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고, 협상안에 대한 국민투표 실시를 압박하는 주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산별 전환 등 대중운동의 재편 과정도 고려해야 한다. 금속과 공공운수 등의 산별 전환 과정에서 지역지부들이 지역 사회운동의 전면에 나서게 하는 게 중요하다. 지역 차원의 진보 개혁, 대중 교육, 생활공동체 건설, 문화 운동 등 구체적인 실천 과제를 모색한 뒤, 산별노조 지역지부 조합원, 농민회 회원 등이 집단적 결의를 통해 이러한 과제들을 함께 수행하는 방식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지역의 공동전선은, 이렇게, 철저히 아래로부터 평조합원․평회원․평당원 수준에서 만들어져야 한다.

  굳이 전국적 차원에서 민중연대를 넘어서는 대중운동 연합의 건설이 시급하다면, 그 시점은 대선 이후가 되어야 한다. 우선 대선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대규모의 토론과 선전 활동을 통해 노동자․민중운동의 공동의 강령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 강령에 기반해서 대선에 개입하고 차기 정권에 대해 사회개혁 요구 투쟁을 벌여야 한다. 이 정도로 무르익은 조건에서라야 공동전선 운동에 대한 보다 책임 있고 진지한 논의를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이가림  필명/서울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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